조선의 대학자 성수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파산서원
조선 성리학의 정신을 만나다.
조금은 일렀던 아침 파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하얀 세상이었다.
눈이 내렸던지가 한참이 지났건만 어제 내린 듯 깨끗한 세상으로 안내해주고 있었으니 그렇게 한적하고 외진 시골마을이었던 것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만의 학문세계에만 빠져있던 조선 유림의 정신이 이러했던가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아우 성수종및 백인걸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0호로 지정된 후 파주 유림이 소유하고 있었다.
켜켜이 눈이 내린 눌노천의 둑방길을 좀심조심 달리노라니 저 멀리 철새들이 대열을 맞춰 날아간다.
길 앞으로는 참새들도 푸드덕 푸드덕, 이곳의 주인은 그렇게 사람이 아닌 자연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길을 한참을 가노라니 드디어 파산서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것은, 죽은 이를 참배하기위해 살아있는 사람은 조금 더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길 바란다는 의미를 가졌을, 지금까지 타고 왔던 말을 이제는 내리라는 의미의 하마비다. 그리고 두 세계를 이어주고 있는 홍살문이 서있다.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임진강이 흘러드는 눌노천과 작은 야산의 뛰어난 풍광안에 자리한 파산서원은 사당을 비롯한 단 두채의 건물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을 뿐이요, 그 옆으로는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머무는 듯한 집에서 낯선 이방인을 경고하는 개의 짖음이 고요한 적막을 깬다.
오지 말아야할 곳을 오기라도 한 듯 괜히 미안해졌으니 파산서원은 그렇게 찾아온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1568년 선조시대에 이이 백인걸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1650년 효종1년에 사액을 받은 후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서원철폐령 때에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것을 복구하였으나 6.25 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단다.
비록 허름한 건물이었으나 자연속에 오롯이 자리한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 탓일까, 파주를 여행하다보면 율곡유적지를 비롯하여 황희선생과 파평윤씨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듯한 고장이란 생각을 하게되는데 파산서원에 이르고보니 그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진다.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져 파벌싸움이 심했던 조선정치사에서 조선 선비에 관한 책을 만나다보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과 명종때 도학과 청절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으니 조광조 사사후 벼승를 버리고 이곳 파주로 낙향 학문연구에 정진했던 인물로 이곳 파산서원이 기호사람이 중심이 된 서인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한다.
그 후 성혼을 추가 제향하고 백인걸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 1785년 정조9년에 성수종을 추가 배향하면서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그후 퇴락하여 현재는 사묘만 남게 되었다하니 세월의 무상함이다.
선향을 배향한 사당 주위엔 담장이 둘러쳐져있고 정면 중앙에 솟을삼문이 보인다. 멀리서 볼때는 문이 굳게 잠겨있어 혹시나 그냥 돌아가야하는걸까 걱정이 되었는데 다가가고 보니 다행히도 문이 열려있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요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며 기둥머리는 이익공의 공표형식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6.25 전쟁 후엔 복원된 건물이었지만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만은 건립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단다.
파산서원, 이 판액은 혹시 조선 학자중 한명의 글씨가 아닌걸까 궁금해지는데 그 어디에서도 안내가 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현재도 이곳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하니 파주 유림의 자취만을 더듬었을 뿐이다.
제향공간을 대표하고 있던 사당과 함께 옆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던 강학공간을 대표하던 강당의 모습이다.
그 옆으로는 비석이 모셔진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는 특이하게도 3기의 비석이 모셔져 있었으니 성수침과 성혼 백인걸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너른 마당을 덥고 있는 눈이었을까. 간밤에 내려앉았을 서리꽃이었을까, 아님 500여년의 정신을 이어온 유교정신이었을까..
파산서원은 아이들마저 평소답지 않은 조신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 학자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먼 곳에서 찾아온 유생들이 공부했을 이곳에서 학문의 깊이는 어디까지인걸까.
그 정신을 더듬어 보았다.
낯선 이방인을 시끄러운 짖음으로 먼저 반겼던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학문에만 정지했던 대학자의 기상만큼은 온전히 전해져 온 파산서원이었다.
글. 사진 이민숙 (경기소셜락커 두공주와)
조선 성리학의 정신을 만나다.
눈이 내렸던지가 한참이 지났건만 어제 내린 듯 깨끗한 세상으로 안내해주고 있었으니 그렇게 한적하고 외진 시골마을이었던 것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만의 학문세계에만 빠져있던 조선 유림의 정신이 이러했던가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아우 성수종및 백인걸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0호로 지정된 후 파주 유림이 소유하고 있었다.
길 앞으로는 참새들도 푸드덕 푸드덕, 이곳의 주인은 그렇게 사람이 아닌 자연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것은, 죽은 이를 참배하기위해 살아있는 사람은 조금 더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길 바란다는 의미를 가졌을, 지금까지 타고 왔던 말을 이제는 내리라는 의미의 하마비다. 그리고 두 세계를 이어주고 있는 홍살문이 서있다.
오지 말아야할 곳을 오기라도 한 듯 괜히 미안해졌으니 파산서원은 그렇게 찾아온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비록 허름한 건물이었으나 자연속에 오롯이 자리한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 탓일까, 파주를 여행하다보면 율곡유적지를 비롯하여 황희선생과 파평윤씨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듯한 고장이란 생각을 하게되는데 파산서원에 이르고보니 그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진다.
그 후 성혼을 추가 제향하고 백인걸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 1785년 정조9년에 성수종을 추가 배향하면서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그후 퇴락하여 현재는 사묘만 남게 되었다하니 세월의 무상함이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요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며 기둥머리는 이익공의 공표형식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6.25 전쟁 후엔 복원된 건물이었지만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만은 건립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단다.
단지 현재도 이곳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하니 파주 유림의 자취만을 더듬었을 뿐이다.
파산서원은 아이들마저 평소답지 않은 조신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정신을 더듬어 보았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학문에만 정지했던 대학자의 기상만큼은 온전히 전해져 온 파산서원이었다.
<파산서원 찾아가는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235
031-940-4354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235
031-940-4354
글. 사진 이민숙 (경기소셜락커 두공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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